자명죽과 삼락정

삼척시 근덕면 덕산리 천혜의 덕산해수욕장에는 덕봉산(德峯山)이 바닷가에 섬처럼 우뚝 솟아 있다. 
선조(宣祖) 때의 일이다. 이 덕봉산에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밤마다 스스로 소리내며 우는 대(自鳴竹)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웃 맹방리(孟芳里)에 사는 홍견(洪堅)이란 사람은 자명죽을 얻기 위하여 덕봉산 신령에게 제사를 올린 후 7일간 밤중에 산신령에게 빌었더니 자명죽을 찾아내었다. 

대나무 한 포기에 줄기가 5개 자라나고 있는 이 대는 마디마디가 총총하고 고른 것으로서 이것을 끊어서 화살을 만들었다. 
홍견은 어릴 때부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담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1572년 선조 5년에 별시(別試)가 있었는데, 이 화살을 사용해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이 화살을 가보(家寶)로 간직하였다. 이후 9년 후 1580년 선조 13년에 홍견의 장자 홍원해가, 1588년 선조 21년에 홍견의 동생인 홍확(洪確)이 이 화살을 사용하여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홍견이 급제한 후 9년마다 그의 아들, 동생이 무과에 급제 되었다 하여 홍씨는 구구(九九)의 수로 번성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자명죽을 얻어 무과에 급제한 홍견은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임진왜란을 당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노구의 몸으로 삼척 고향 맹방리(孟芳里)로 돌아왔다. 또 그의 둘째 동생 홍확도 무과에 급제한 후 울진 현령 및 울진포 만호의 벼슬을 지내다 노구의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 셋째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홍광(洪圓)으로서 원래 성품이 온화하고 산수를 좋아하며 벼슬에는 나가지 않고 전토(田土)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이들 형제들은 관직을 버리고 백발이 성성한 몸으로 맹방구은(孟芳舊隱)에 돌아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젊었을 때의 청운의 꿈을 안고 공명 사업을 펴 보겠다는 그러한 기백을 반추하며, 서로 손등을 두들기며 형제애를 맛보고 있었다. 임진왜란이라는 대국란을 겪던 격량기에 객지에서 향수를 느끼며 고향에 돌아온 3형제의 우애는 더욱 돈독했다. 

그러나, 이 상봉의 기쁨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서로간에 생활의 터전을 찾아 3형제는 남북 40리를 사이에 두고 생활 근거지로 헤어지게 되었다. 형인 홍견은 맹방리 고향집에 그대로 있고, 동생 홍확과 홍광은 북평으로 분가하여 살게 되었다. 
모처럼의 상봉에서 다시 이별한 형제들은 남북 40리 중간 지점인 삼척 남양리(南陽里) 속칭 사대에 정자(亭子)를 지었다. 그리하여 매월 보름이면 서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이 정자에 모여 그들의 뇌수 속에 아로새긴 지나온 인생 행로를 더듬으면서 형제의 애정을 해가 저무도록 나누게 되었다. 

이러한 모임을 1년 열두달 보름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행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수로 오십천(五十川) 강물이 넘쳐흘렀다. 이들 형제들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이 정자에 모이려고 하였으나 물이 불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이들 형제들은 한자리에 모일 수 없어 형은 남쪽강 언덕에 동생들은 북쪽강 언덕에 서로 바라보며 자리를 잡았다.술잔을 들어 강건너 형에게 술을 권하면 형은 잔을 직접 받을 수가 없어 스스로 술잔에 술을 부어 동생들이 권한 술로 생각하며 마셨다. 형도 동생들에게 잔을 권하면 동생들도 형과 같이 자작으로 술을 마셨다. 
이들 형제들은 온 종일 잔을 같이 들어 권하고 마시면서 강물이 사이에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형제간의 화락(和樂)을 즐겼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형제의 우애를 부러워할 뿐만 아니라 이 정자를 삼형제가 화락한 곳이라 하여 삼락정(三樂亭)이라고 불렀다. 이 삼락정은 삼척 남양동 사대에 있었다고 하였으나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오늘날에는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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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1-06-01 16: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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