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포진은 수군의 기지입니다. 현재 오분리 고산성과 정상리 육향산 주위가 그 위치입니다. 이 곳은 오십천 하구에 위치하여 수백 척의 전선이 정박할 수 있는 자연항구입니다. 이 지역은 동해안의 중간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함흥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되고 또한 오십천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면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과 교차하는 동서남북의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초기부터 신라와 고구려는 삼척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신라가 실직국을 복속시키고 울릉도를 정벌할 때에도 그 출항지가 바로 삼척포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우산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삼척포진이 있는데다가 전선이 정박할 수 있는 최적의 자연항구였기 때문입니다.

그후 신라는 이곳에 실직정(悉直停)이라는 군단을 두고 국방에 임했고, 고려시대 우왕10년(1384)에는 요전산성을 토성으로 축조(주위 1,870척. 약566.6m)한 후 삼척포진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라는 수령을 두어 왜군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삼척포진의 만호는 수령이 겸하였으나 조선 태조 6년(1397) 만호를 첨절제사(僉節製使)로 승격시켜 단독 진장을 두었고, 태종9년(1409)에 다시 부사가 겸직하게 되었다가 세조12년(1466)에 다시 분리되어 진장(鎭將)을 두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병제(兵制)의 많은 변혁을 겪으면서 인조5년(1627) "영장" 이라는 직을 만들어 전문적인 무장이 삼척포진의 책임자가 되게 했으며, 현종13년(1672)에는 삼척포진의 영장으로 하여금 영동 9개 읍의 군사권을 관장하게 했으며 다음 해인 1673년에는 삼척영장으로 하여금 토포사를 겸하게 하여 철원지역까지 수사권이 확대되었습니다. 숙종20년(1694)에는 울릉도를 수토하기 위해 삼척영장과 울진 만호(萬戶)가 매년 교대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동해안의 해상방위와 치안의 본산이었던 삼척포진영은 고종35년(1898) 영장 김범구를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지금은 진영의 성곽 남단에 자리잡고 있던 육향산 정상에 1662년 부사 허목이 남긴 척주동해비와 대한평수토찬비만 남아있다.

삼척포진영의 위치는 신라, 고려, 조선 초 세조 때까지 오분리의 요전산성이었으며 육향산 아래로 옮긴 것은 중종 초기인 1510년 전후였습니다. 1898년까지만 해도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밑에는 돌로 쌓은 석성이 남아 있었는데 이 곳이 바로 동해를 지키기 위해 설치했던 조선시대의 삼척포진성 자리입니다. 이 진영의 성 동쪽 문루를 진동루, 혹은 안해루 또는 세병루라고도 불렀는데 조선 중종 6년인 1511년 삼척부사 이함(李函)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삼척포진의 아사(衙舍)는 고종35년(1898) 화재로 소실했습니다. 그후 1916년 삼척항을 축조할 때 삼척포진성을 허물었습니다.

선조 때의 대학자였던 성암 김효원이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진동루라는 현판을 썼고, 임진왜란 중에는 부사 안종록이 근덕면 영은사에 있던 8백근짜리 불종을 이 누각에 매달아 위급할 때 종을 쳐 주민을 모아 적을 막아냈으며 후에 불종은 영은사로 돌려 보냈다 합니다. 그리고 숙종 37년(1711) 삼척부사로 온 이성조는 글씨 잘 쓰는 선비로서 안해루라는 현판을 써서 달았고, 죽서루에는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써 남겼습니다.

이 진동루는 그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왔으며 고종 24년(1887)에 글씨 잘 쓰기로 유명한 소남 이희수가 다시 [진동루] [토포아문]이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명사들의 현판글이 많았으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이 없으며, 소남 이희수의 [토포아문]이란 현판글은 십 년 전까지 삼척지방의 마지막 유학자라고 했던 김영경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3년 전에 삼척시에서 구입하고자 했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후였습니다.


※동대지(東臺池) : 삼척포진영의 둔전(屯田)을 이용하는 제언(堤堰 : 저수지)

동대지의 서쪽고개를 동대현(東臺峴;동대고개)이라 했는데 지금은 [동두구비]로 속칭되고 있음. 동대지의 서북쪽 골짜기를 가사곡(袈裟谷)이라 하며 호대사(虎大寺)라는 절이 있었음. 지금의 정라초등학교 자리.


※참고자료 : [삼척시지] [삼척군지]


선조 원년(1567)

삼척포진영의 군비(軍費)를 충당하기 위해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둔전 위쪽에 동지(東池)라고 하는 소택(小澤)이 있다" 하였으니 동지는 동대지로 정라초등학교 아래 쪽에 있던 동대제언을 가리키며, 둔전은 봉황산 북쪽 골짜기였음.

성종 원년(1470)

강원특별자치도 병선(兵船) 수는 소맹선(小猛船)14척 중 삼척포 4척, 울진포와 고성포에 각각 3척, 월송포 안인포에 각각 2척 배치

성종8년(1477)

"삼척에는 수철(水鐵)이 나오므로 삼척포 수군 90명 중 40명을 동원 채취하여 염부(鹽釜 : 소금가마)를 만들어 사용토록 하였다" 는 기록으로 보아 90명의 수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성종 12년(1481)

해안에 봉수대(烽燧臺)와 후망(?望 : 해안초소)설치

  • 봉수대(5개소) : 가곡산 임원산 초곡산 양야산 광진산
  • 후망(5개소) : 개곡 궁촌 덕산 굴암(추암) 냉천(찬물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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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2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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