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실직국이 한국 역사의 무대에 실명(實名)으로 등장한 것은 서기 102년부터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파사이사금 23년 조(條)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102년 8월 실직국은 경북 경주 인근의 군장국가인 음집벌국(音汁伐國,지금의 경북 안강)과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입니다. 오늘날 경북의 울진, 영해, 영덕을 지나 경주의 관문인 청하면 지역까지 쳐내려 가서 그 지역의 음집벌국과 전쟁을 치룰 만큼 실직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실직국과 음집벌국은 전쟁을 하다가 당시 남쪽지역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의 왕을 찾아가 판결을 요청합니다. 이에 신라왕은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금관국의 수로왕을 초청하여 판결을 내리게 했는데 수로왕은 문제의 그 땅을 음집벌국의 것이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신라왕은 재판관으로 초청했던 수로왕을 위해 6부(部)에 명하여 잔치를 벌이도록 합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수로왕을 위한 잔치” - 이것이 실직국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신라의 6부-급량(박씨),사량(김씨),본피(정씨),모량점량부. 손씨),한지(잠탁부. 배씨),습비(석씨.안강지역)-에서는 수로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게 되는데, 6부 중 5부에서는 이찬이라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수로왕을 접대했지만 오직 한지부(漢祗部,또는 한기부漢岐部)만이 벼슬이 낮은 자가 접대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수로왕은 화가 나서 부하에게 명하여 한지부의 족장격인 보제를 죽이고 금관국으로 귀국하였으며, 한지부의 족장 보제를 죽인 수로왕의 부하 탐하리는 음집벌국으로 도망가 숨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크게 노하여 살인범 탐하리를 찾아내려 하는데 음집벌국의 왕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군사를 내어 음집벌국으로 쳐들어갑니다. 이에 음집벌국의 왕은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고, 이 때 실직국과 경북 경산지역의 압독국도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04년 가을 실직국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접전을 벌이지만 다시 패하게 되고, 신라는 실직국의 핵심인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실직국이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실직국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독립된 국가로서 자치권을 확보하면서 정기적으로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상호병존적 관계를 유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138년부터는 신라의 왕이 실직국의 영역인 태백산에서 친히 제사를 지낼 만큼 실직국은 신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이 되면 실직국은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480년 경 마침내 자치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실직국은 480년부터 500년까지 약 20여 년 간 고구려의 직접통치를 받습니다.
481년 영해까지 장악한 고구려는 점령국을 자국의 군현(郡縣)으로 복속시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는데 실직국 역시 고구려 군현의 하나인 실직군(悉直郡)으로 개편되어 고구려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실직국의 영역은 실직군 밑에 죽현(죽령)현, 만경(만향)현, 해리(파리)현, 우곡(우계)현, 우진야현이란 5개의 현을 두었다는 고구려의 군현제 기록으로 보아 북으로는 우곡현(羽谷縣.羽谿縣;옥계), 서로는 죽현현(竹峴縣.竹嶺顯;하장), 남으로는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원덕)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 우시군(于尸郡;영해) 아혜현(阿兮縣;청하) 야시홀군(也尸忽郡;영덕)지역까지가 실직국의 영역으로 파악됩니다.
이로써 동해안지역을 대표했던 군장국가 실직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이 3국의 열강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한국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실직국 관련 참고 자 : [울진군지]. [울릉군지]. [삼척시지]. [삼국사기], 울진문화 제6호(울진문화원,1991), [실직문화]제3-4집(삼척문화원,1992-3)
죽령현은 본디 고구려의 죽현현으로 경덕왕이 죽령현으로 개명
남쪽 109리 죽령현(옥원역이 죽령현의 옛터)
죽현.죽령은 부 서쪽 50리. 고구려 때 奈生於
태조2년(1393) 송곡(宋谷)은 옥원 동쪽에 있고, 송곡 북쪽은 부신당이 있으며, 연못 앞에 해망산이 있고, 부신당 남쪽에 죽현이 있다
여관인 죽원(竹院)이 하장면 원통(원동-1995년 태백시로 편입)에 있었고, 미로와 하장의 길목을 댓재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