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세 삼재면(李三世 三災免)

〈이삼세 삼재면(李三世 三災免)〉이 글씨는 태학관이었던 원천석(元天錫)과 관련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공양왕 말년 이성계가 등극하자 원천석은 태학관으로 국사를 인도하였으며 후대인 정종 임금이 왕위를 이어받아 등극한지 두 해만에 동생 태종에게 밀려났다. 이를 본 태조 이성계는 노하여 옥새를 가지고 함흥으로 갔는데, 태종은 원천석을 불러 태조의 노여움을 풀도록 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살해하라고 시켰으나 이것을 미리 안 원천석은 죽장에 삿갓을 쓰고 목숨을 도망하여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옮겼다. 
얼마후 동해안을 따라 내려 가다가 우연히 노곡면 마읍천을 걷다가 활바지라는 곳이 산수가 좋고 숨어살기 좋을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정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어느덧 세월이 흘러 원천석은 백발이 성성해지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니 태조와 정종, 태종에게서 세 번 재앙을 면하고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을 마음으로 느껴 활바지(弓田) 사다리 바위에 다음과 같은 글씨를 새겨 놓고 활바지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하나 그 묏자리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것이〈李三世 三災免 丁酉春 弓谷標>라고 새긴 것이다. 
[연려실기술]이나 기타 문적에 보면 원천석은 고려가 기울고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쥐자 벼슬을 사직하고 치악산에 숨어 몸소 밭을 갈아 어버이를 공양했다 한다. 태종이 어렸을 때 운곡(耘谷)에게서 글을 배운 바 있어 왕위에 오르자 자주 불렀으나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의 한시집 2권과 시조 2수가 전하는데 [청구영언]에는 유명한 시조‘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쳐 시니/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계워 하노라’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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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1-06-01 16: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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