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우금관의 전설과 전주 이씨 시조묘

이안사(李安社)즉 목조(穆租)가 부친상을 당하여 아버지 이양무의 묘지를 구하려고 사방으로 해매다가 노동(盧洞)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한 도승이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혼자 말로〈참 좋구나, 대지(大地)로다.>하는 것이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있었으므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도승은 이처럼 탄성을 올리면서 계속하여〈그렇지만 개토제에 소 일백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을 금으로 만든 것을 싸서 장사를 지내야 하겠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제압하고 창업 주가 될 명당이로다.>하는 말을 남기고 수 백보를 가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금으로 만든 관은 더욱이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다.〈그렇다.〉손바닥을 친 이안사는 소 일백마리는 흰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부인과 의논을 하였다. 
부인에게는 다른 말을 일체 하지 않고〈내일 밭갈이를 할 터이니 처가의 흰 소를 잠시 빌려 오시오>라고만 하였다. 다음날 친정에 가서 흰소를 데리고 부인이 오자 이 소를 노동으로 몰고 가서 양심의 가책을 무릅쓰고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친을 넣을 관에 씌울 금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였는데,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1231년 부친의 장례를 치른 묘가 지금의 준경묘(濬慶墓)로 1981년 8월 6일 지방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이태조의 5대조인 목조의 부친인 이양무의 준경묘는 1899년 영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하여 정자각과 비각을 지었으며 준경묘에는 재실 비각을 건축하였다. 구거지는 전주 이씨의 실묘로 매년 4월 20일 전주이씨 문중에서 시조묘 제례를 지내고 있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의 산 속에 있는 준경묘(濬慶墓)는 조선조 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의 아버지 이양무의 묘이다. 이양무의 부친은 전주 이씨 16대손인 이인(李璘)이었고, 모친은 남평 문씨 부인이었다. 어머니 문씨 부인은 지체가 높은 충숙공 문격금의 딸이었다. 
이인이라는 분은 무예가 뛰어난 사람인데 고려 시대에 내시집주로 임명되었다. 

당시 전주의 기린산에 있던 이씨 가문의 묏자리는 풍수 지리상 지기(地氣)가 서려 있어 이곳에 묘를 쓴 집안은 왕족으로 번성하여 흥할 터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러한 소문이 결국은 임금을 모독한 죄라 하여 이인은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씨 가족은 모두 함경도 길주지방인 길성(吉城)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고려 조정에서는 3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시켜서 이씨 집안의 묘를 파헤치는 벌을 내려 임금에게 반역자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당시에 나이 16세였던 문씨 부인은 세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길성 유배지로 갔다가 흉년이 들고 오랑캐로 인해서 다시 더 북쪽인 함경도 경산(慶山)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전주 일대인 안남(安南)으로 유배지를 바꾸게되면서 어느 정도 고생도 덜하게 되었고 살길이 열렸다. 
이인의 아들 이양무는 어머니를 따라 여러 곳을 피난하면서 성장하게 되었는데 그가 전주 이씨 17대손이다. 이양무 역시 무예가 뛰어난 아버지를 닮아 훌륭한 장군이 되었으며 상장군이던 이강제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 
이들 사이에는 이안사를 비롯한 영필, 영밀, 영습의 네 형제가 태어났으며 이 중 첫째인 이안사가 바로 조선조 창업을 노래한 {용비어천가} 첫 구절에 등장하는 해동 6룡 중의 첫째 조상인 목조(穆祖)이다. 

이안사는 고려 고종때 서주지사로 임명되어 정치를 잘하였으며 부인인 이씨는 평창 이숙(李肅)의 딸로 그의 생모는 청양정씨로서 정석(鄭碩)의 딸이다. 그러므로 목조는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가 되는 것이다. 
이양무는 완산(지금의 전주)에서 세력을 지닌 호족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아들 이안사 역시 호방한 무인 기질을 지녔으나 온후한 성품의 소유자로 좋은 평판을 들었다. 그러나 당시 전주에 있던 지주사(地州事)와 사소한 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한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전주에 오게 되자 지주사가 대접한다는 구실로 이안사가 아끼던 관기(官妓:관청에 속한 기녀)를 강제로 수청들게 하여 말썽이 생긴 것이다. 비록 관기의 신분이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법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지주사와 이안사는 서로 반목을 하게 되고 이안사는 여러 가지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결국 이안사는 부친인 이양무를 모시고 그를 따르는 170여 가구와 함께 강원도 삼척땅 활기리 일대로 이주를 한 것이다. 
활기리에 머물게 된 1년후 부친인 이양무가 돌아가시게 되어 고려 고종 18년(1231) 노동에 장사를 지내고 또 모친이 사망함에 따라 동산리에 묻었다. 활기리 구지를 중심으로 남쪽 노동에 부친 이양무의 준경묘가 있고 북쪽 동산리에는 지방 기념물 제43호로 1981년 8월 6일 지정된 이안사의 모친 평창 이씨의 영경묘(永慶墓)가 있다. 

백우금관의 이야기처럼 부친의 묏자리를 잡은 이안사는 삼척에서 자리를 차츰 잡고 있는 가운데 소식을 듣기를 자신과 갈등이 있던 지주사가 관동 안렴사(按廉使 : 조선조 관찰사와 같은 벼슬)로 부임하여 삼척으로 순시를 나온다는 말을 듣고 다시 옮겨가게 되었다. 일설에는 처가 집의 흰 소를 잡아 제물로 쓰고 다시 소를 돌려줄 길이 없어서 도피 했다고도 한다. 
이안사 일가 170여 호가 다시 옮겨간 곳은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덕원군 용주리로 이곳에서 그는 여진족의 천호(千戶)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백우금관의 전설과 같이 한 도승의 예언대로 이안사 부친 이양무를 위해 준경묘를 쓰고 나서 5대만에 고려를 제압하고 조선조 5백년 창업의 태조로 이성계가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활기리에 있는 목조의 옛집 자리는 돌담의 자취가 남아 있고 샘물이 있으므로 그곳을 택대(宅垈), 택전(宅田), 택정(宅正)이라 부르다가 이성계가 왕위에 등극 후 에는 왕(王)자를 붙여 부르게 되었다. 

활기리는 지명유래상 왕조의 창업을 예조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활기리를 처음에는 황기(皇基)라 하여 임금이 태어날 길지로 불렀다. 또한 인근의 말굴레산, 시임마골, 군사가 주둔한 것과 같다는 둔곡(屯谷), 종묘사직을 잇는다는 의미의 직곡(稷谷), 적을 막는다는 뜻의 방위재산과 같은 지명 또한 그러한 기상을 반영한 것이다. 
조선조 태조 2년(1393)에는 삼척군을 목조의 외향(外鄕)이며 선대의 묘가 안치된 곳이라 하여 군(郡)에서 부(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 하였다. 
홍서대는 삼척시 당저동 삼척김씨 재사내에 보관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관한 집을 보대운한각(寶帶雲漢閣)이라 부른다. 서대는 조선조때 1품의 벼슬을 가진 관리가 두르던 띠로 물소뿔 장식이 되어 있으며 정장을 할 때 사용하는 의장이다. 이것은 민속자료 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척시 활기리 노동(蘆洞)에 이양무가 묻힌 때는 고려 제23대 고종 18년(1231)이었으며 이로부터 162년 후에 이양무의 후손인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창업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삼척은 조선왕조의 개국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문화 유적 역사의 고장이 되었으며, 준경묘와 영경묘는 그러한 역사를 반영하는 현장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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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1-06-01 16: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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