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걸남장군의 전설

박걸남(朴杰男)장군은 삼척시 노곡면(盧谷面) 여삼리(閭三里)에서 탄생하였다. 부친의 나이 40세가 되어도 자식이 없어 근처의 금태봉(金태峰)이라는 명산에 들어가 100일 기도를 드리던 마지막 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큰 칼 한자루를 내어 주며 이는 용천검(龍泉劍)이니 잘 기르면 반드시 쓸 곳이 있을 터이니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으나 신기하게도 두 내외가 같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과연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열달 후에 출생을 앞두고는 기도를 드렸던 금태봉산이 3일을 끙끙 울더니 걸남장군이 태어났다. 전하는 말로는 선녀가 내려와서 바라지를 하고, 그 집 대문에 피를 칠하여 표를 해 놓고 갔다고는 하나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박걸남 장군은 담도 세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음성이 마치 백호가 산 위에서 우는소리 같았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는 한말 밥을 먹고, 술은 동이 채로 마셨다 한다. 그는 매우 황잡했으나 주위에 말 할 사람이나 해칠 사람도 없었으며, 그는 책도 보지 않아 무식한 농부였지만 힘은 천하장사였다. 
때는 이조 선조 25년경이었는데 근처 산전에 가서 황소 두마리로 밭갈이를 하던 중 나라에서 난이 일어나 군대 동원령이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박걸남장군은〈때는 왔다.>하면서 소에 씌운 멍에를 벗기지도 않고 쟁기가 달린 채 황소를 끌고 집으로 왔다. 부친 앞에서 무한히 기뻐하며 점심도 안 먹고 전쟁터로 떠난다 하니 아버지가〈전쟁은 한창인데 네가 무슨 용맹이 있겠느냐?>하니, 박장군은〈소자, 비록 기운은 없으나 아버님 보십시요>하며 앉았던 방에서 왈칵 치솟으니 천장과 지붕 말기를 뚫고 나와서 그 길로 바로 한양 길에 올랐다. 때마침 당나라 장수 이여송과 이여백, 이여매의 3형제와 해군으로 이이진이 10만 대군을 인솔하고 왔을 때이다. 군에 입대하여 여송군대의 지휘관으로 한 일은 첫 육박전을 겪게 되었다. 박장군은 교전하다가 키가 7척이 넘고 코는 먹통 같고 두주리를 천둥같이 갈고 덤벼드는 왜장 가등청정의 말 왼쪽 다리를 베었다. 그래서 왜장 청정은 우리 장군의 말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전한다. 

7년후, 전라도 지방은 왜적이 그곳에 농사를 지으면서 물러가지 않더니 왜국의 풍신수길이 죽으며 철병령이 내려 왜적은 물러가고 우리 나라는 완전히 평란되었다. 전란후 선조왕은 태평연을 베풀고 노고를 치하하며 벼슬을 하사하였다. 그 때 박걸남 장군은 국고에 들어가 엽전 500냥을 몸에 감고 마루에 올라서니 마루의 널빤지가 부러졌다. 그걸 본 왕은〈박장군은 가진 돈만 해도 공의 대가가 되었으니, 벼슬을 그 만두라>고 하니 박장군의 7년 동안 애쓴 공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대신들이 박장군의 공이 크다고 상신 하니 왕이 병조판서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박장군의 묘를 3백년 뒤 이장할 때 백골은 황금 같고 두골부터 족골까지는 환골인데 두골을 드니 족골까지 연결되어 있었다는 후손들의 설이 전한다. 

그 후, 박걸남 장군의 묘는 수 년전에 국고 보조를 받아 대대적인 정화를 하였다. 묘는 노곡면 여삼리에 있고 그 앞에 사당이 있어 매년 후손들이 제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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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1-06-01 16: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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