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 마지막 왕 공양왕릉

삼척시내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7번국도를 따라 남으로 40리 가량 내려가면 삼척시 근덕면 궁촌(宮村) 추천리에 이른다. 이마을 옆을 지나는 7번 국도변에서 바로 건너다 보이는 바닷가 쪽 야트막한 산등성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이 무덤은 봉분만 보통 무덤의 열배 가량 커 예사 부덤이 아니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4개의 무덤 중 앞에 있는 3기는 근래에 봉토를 개수하여 왕릉같이 크고 그 중 남쪽이 공양왕릉이고 나머지 2기가 왕의 두 아들이며 개봉(改封)하지 않은 채로 있는 무덤이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이 고장 사람들이 믿고 있다. 

1942년 음 3월 20일에 근덕면장 김기덕(金基悳)이 <고려왕릉 봉찬회>를 구성하고 왕릉제향 행사를 하였고, 이듬해 음4월 2일 두번째 제향행사를 하고 매년 이어진다고〈송파일지(松坡日誌) 金暢淵편저>에 기록되어 있는 제문은 아래와 같다. 
“고려의 옛 왕릉에 고하나이다. 거룩한 고려의 대업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국도(國都)를 송경(松京=開城)으로 정했다. 태평성대를 누리던 융성한 국운은 475년간 용의 비늘과 봉황의 날개로 찬란했다. 보위 34대왕으로 전해오는 동안 흥망성쇠는 무상하였다. 마지막에 왕운은 불행을 당하여 산해(山海)에 한줌의 흙이 되어 무덤 속으로 돌아가고 강산은 주인이 바뀌어져 영혼은 보금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으니 천 년 한 이로다. 세월은 아득히 흘러가고 사람마저 사라졌으니 이 왕의 능에는 향불도 지키는 사람도 없어서 좌우 밭둑길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앞뒤 언덕에는 가시덤불만이 무성하니 더욱 한스럽다. 왕우(王禑)의 능인가 공양왕의 능인가 마을 사람들의 뜻있는 말로는 공양왕릉은 사기(史記)에 고양 견달산에 있다하며 또 어떤 사람의 말은 왕우의 능은 사기가 분명치 않고 단지 강릉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여기와 가까운 곳으로 보아 우왕의 능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문헌의 고증이 없고 전설뿐이다. 공양왕릉 역시 같은 형편으로 누가 올바른지 말과 글이 서로 틀려 상세치 않다. 그러나 어느 한분의 능이라고 믿어지나 어느 분의 능이라고 말하기는 분명히 밝힐 수 없다. 이에 마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능댁(陵宅)을 개축하고 영역(塋域)을 새롭게 단장하오니 왕령(王靈)께옵서 신명(神明)에 감읍하옵길 빌며 삼가 맑은 술과 제수를 갖춰 제향드리오니 흠향하옵소서”와 같이 1942년 봉릉제 행사 25일 앞서 4월 11일에 능을 수축하였다. 

1976년에서 1980년 사이 근덕면장 최문각은 재직중 군수의 지시를 받고 공양왕릉의 개봉역사를 1977년에 담당하였다. 최면장은 능임을 확정지으려고 발굴하려 했으나 궁촌리 마을 사람들이 이 능을 발굴하면 동리가 망한다고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무덤의 앞부분의 석축을 허물고 조금 파 들어갔더니 능의 정면에 세로 약40㎝, 가로 약20㎝의 석판이 있었고 약 1척 정도 내부에 석관이 보였다고 한다. 더욱이 개봉 역사 중에 능이라는 무덤과 다른 2기 무덤에서 구렁이가 나와 모두 놀라 틀림없이 이 무덤은 공양왕과 두 아들의 무덤이라고 믿게 된 여담도 있다. 
궁촌마을 사람들은 동제에 앞서 왕릉인 이 무덤에 제사를 올리고, 또 능앞에서 생선을 말리면 바람에 불려 나가는 등 이 무덤에 대해서 경건함과 두려움을 갖고있다. 능 아래에는 옛날에는 못이 있는데 메워졌고 그 못가에는 비석이 많았으나 일정 때에 못을 메우면서 모두 그 안에 넣었다고 한다. 그 비가 공양왕릉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발굴해 보아야 알 일이다. 
고려왕조 마지막 왕 공양왕릉에 대해 일반 전승의 전설을 간추려 기록으로 남긴 것은 1916년 심의승(沈宜昇)이 편집한〈삼척군지(三陟郡誌)>에 실려있다. 그 내용은 근덕면 궁촌리는 고려 공양왕릉이 천궁 하였으므로 궁촌이라 이름한다 하였고“그 북방에 고돌치(古突峙:고돌재)가 있는데 이 고돌치에 공양왕릉이 있으며 지금도 마을 사람들에게 공양왕릉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왕이 살 때는 동현(銅峴)이 있어 동문(銅門)을 세우고 사라치(沙羅峙)에 살문(箭門)을 세웠다고 한다.”고 하였고 허목(許穆)이 쓴‘척주지’중 이에 대한 기록을 실었다. 이 고장 사람들은‘사라치’란 공양왕을 살해한 곳으로‘살해재’가 변한 말이라고도 한다. 

허목(許穆)은 세상이 다 알다시피 깐깐한 성격의 고집있는 학자요 정치가였다. 그는 중앙에서 소위 복상 문제로 서인과 다투다가 실패하여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는 현종1년에 삼척부사에 부임하여 2년 후에‘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였다. 그의 성품으로 보아 그의 저술은 믿을 수 있고, 이 책을 저술할 때 이 고장의 노인들이 전하는 말과 늙은 향리 김윤식과 김영관 등이 소장하고 있던 문서를 참고하였다고 하였다. 이‘척주지’덕번(德藩)에 실려 있는 기록이 삼척 공양왕릉에 대한 처음 기록이다. 그 내용은 대개 다음과 같다.“추라(楸羅,오늘의 추천리 즉 궁촌)에 고총이 있는데 왕릉이라고 한다. 오늘도 궁촌의 밭을 옛 궁터 자리라고 하는데 깨진 주초석이나 기와도 없다. 늙은이들이 전하기를 고려 공양왕이 원주로 은둔한 후 간성으로 옮기고 우리 태조 3년에 삼척에서 돌아갔다고 한다. 그때의 왕의 집은 민가에 불과하였고 돌아간 후의 장례도 역시 이와 같았다. 그 곳에 산지기 1인만이 있고 분묘는 폐허화하였다. "이와 같던 무덤을 헌종 3년(1837년) 가을에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이 봉토를 새로 하였다. (척주선생안 陟州先生案참조) 

그 후 앞서 든 바와 같이 1972년과 1977년에 새로 큰 봉분을 만들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여말선초의 일들은 비밀에 부쳐 있었고 더욱이나 조선왕조 실록은 사관 외에는 볼 수 없어서 중앙의 왕이나 신하들도 공양왕이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잘 모르고 있을 때에 허목의‘척주지'에 기록되어 있듯이 삼척 고장 사람들은 구전이건 기록에 의하건 간에 공양왕이 살고 있던 곳과 죽은 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삼척 공양왕릉은 전설에 지나지 않는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미루기는 힘들다. 아무래도 어떤 사실의 반영이라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사학자 최영희 교수의 증언이다. 
"고양과 삼척 두 곳의 공양왕릉에 대해서 어느 것이 실제인가를 판정 내리기 전에 먼저 생각하여야 할 일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고양의 공양왕릉은 조선왕조가 공적으로 인지한 능이다. 
그러나 한편 삼척의 공양왕릉도 실제로는 어떤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기록과 구비 전설을 토대로 하여 여러 가설을 추측해 보는 일이다.”최영희 교수는 계속 말한다. 

고양군 공양왕릉에 전하는 전설 중에서도 공양왕이 그곳 못에 투신자살했다는 것은 틀린 일이고 공양왕과 두 아들의 시신을 어떻게 하였을까. 그 시신을 태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개경까지 운구하든가, 고려 왕족과 연유 있는 곳에 매장하던가, 살해된 곳에 매장하던가 하는 3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아직 고려 왕실에 대한 흠모의 정이 클 때라 인심의 동요가 일어날까봐 왕의 시신을 더욱이 고려왕조의 중심지였던 개경으로 운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살해한 곳에 매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고양군 공양왕릉은 무엇일까 이 능은 공양왕비 노씨와도 관계가 깊은 곳이다. 왕비 노씨는 교하(交何)인으로 교하는 바로 고양과 인접해 있고 또한 왕씨 무덤이 개경을 중심으로 한 경기 지방에 많이 있어서 이곳에 능을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에 먼저 삼척시에 왕을 매장하였다면 그 후에 고양군으로 이장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한 허장으로 능을 만들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어느 쪽은 시신이 없는 허묘일 수도 있다. 
전 근덕면 최면장은 능을 발굴하여 사실을 밝히고자 하나 무덤은 함부로 발굴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추측은 더욱 이 두 무덤에 대해서 미궁에 빠지게 한다. 다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삼척의 고양왕릉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라고 최영희 교수는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공양왕의 이름은 요(瑤), 정창군(定昌君)이요 20대 신종의 7대 손이고 정원부원군(程原府院君) 균(鈞)의 아들로서 비는 창성군(昌城君) 노진(盧진)의 딸 순비(順妃) 노씨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양왕은 성품이 우유부단하다 하였다. 공양왕이 즉위한 해는 1389년으로 나이 만 34세 때였다. 공양왕은 즉위할 때도 눈물을 흘렸고 퇴위할 적에도 눈물을 흘렸으니 눈물과 비운의 왕이 였다. 재위 4년만인 1392년 4월 12일 공양왕은 의장병이 도열하고 있는 이성계의 사저를 찾아가 동맹의 주연을 열었다. 그해 7월 17일 이성계는 개성 수창궁에서 부하들이 만세를 부르는 가운데〈조선왕조>의 시조로 등극하였다. 
공양왕은 어떻게 되었는가. 태조실록 권1, 7월 17일조에 짤막하게 "마침내 원주로 떠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경에서 강원도 원주로 내려간 공양왕은 8월에 왕에서 군(君)으로 직위가 떨어지고 간성군(杆城郡)으로 옮겼다가('태조실록' 권1, 1년 8월 병진조) 그후 다시 삼척으로 옮겨졌다. '태조실록' 권5, 3년 3월 계축(14일)조에 "공양군 3부자를 삼척에 옮기다."라는 기록이 있다. 공양왕 3부자란 공양왕과 장자 석(奭)과 차자 우(瑀), 3인을 가리킨다. 이렇게 공양왕을 옮긴 까닭은 한 곳에 오래 머물게 하면 고려 왕실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어떤 모의가 있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조선왕조는 공양왕 3부자를 삼척에서 살해하여 고려 왕씨 왕족의 맥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태조 실록’권5, 4월 병술(17일)조에는 아래와 같은 공양왕의 최후에 관한 기록이 있다. 공양왕 살해 특사로는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晉) 형조전서 함부림(咸簿林)이 파견, 4월17일에 태조의 전지(傳旨)를 갖고 삼척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를 목매 죽이고 두 아들에게 미치었다(逐絞之, 及二子)"라고 하였다. 이때 공양왕의 나이 만 49세였다. 
● 참고문헌.〈공양왕릉 소재지 고찰〉김종욱, 1990 실직문화 1집, 삼척문화원 
〈공양왕릉의 미스터리〉최영희, 1990 월간태백, 8월, 강원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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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1 16: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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