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 자는 계순(啓純), 봉사(奉事) 인지(仁祉)의 아들. 1606년(선조 39)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정온(鄭蘊)등과 함께 사마방목에 올랐다. 당시에 박세신(朴世信)이 향교의 재물을 절취한 사건이 있었을 때 선비들과 공론을 형성하여 학적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는 동시에 과거에 응시를 금지하는 정거(停擧)의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이에 박세신은 본부(本府)의 역리(驛吏)인 최윤충(崔允忠)·신안역(新安驛)의 박언종(朴彦宗)과 공모하여 선비들을 모함함으로 1617년(광해군 7)에 무과에 급제한 홍연해(洪聯海)·김익건(金益鍵)·김시건(金時鍵)·최홍립(崔弘立)과 더불어 상부에 소송하여 간사한 무리들의 소행을 밝혔다. 또 유림(儒林)과 협력하여 향교의 동·서무(東·西?)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