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섭(洪樂燮)
1874-1918, 서화가, 송정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백천(白天), 호는 용대(龍大)·석사(石史)·만재(晩齋)이다. 그는 송정의 솔밭인 '담안'에서 성장하였으며, 담안의 건물은 1백칸에 이르렀다. 소남 이희수(李喜秀) 밑에서 서도에 정진하였다. 그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과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소남은 그를 가리켜 '낙섭은 역시 눈설미가 있어 수제자감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그리고 해강은 그의 해서체(楷書體)에 대해 '동대문 밖은 자네가 맡게'라고 칭찬하였다. 그는 소남을 계승하여 명필의 지위에 올랐으나, 44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는데 미치지 못하였다. 소남과 그의 글씨는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닮았다. 생전에 시문(詩文)·제문(祭文)·상량문(上樑文)·묘표(墓表)·행장(行狀) 등을 기록한 <<晩齋集>>과 <<講會契錄>>이 전한다. 그의 글과 글씨는 영동지역에서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주어 한꺼번에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인물을 배출하게 하였다. '致巖堂'의 글씨 등 그의 해서(楷書)는 동대문 밖에서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 올 만큼높은 경지에 있었다. 제자로서 심지황·최중희 등도 일가를 이루었으므로 소남·만재로 이어지는 영동서화인맥(嶺東書畵人脈)이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