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휴는 고려 고종11년(1224)에 태어나서 충렬왕 26년(1300)까지 살았던 고려후기의 문인이며 정치가였습니다.
이승휴의 자(字)는 휴휴(休休)이며, 자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입니다. 경산 가리현(加利縣) 사람으로 가리이씨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가리현인으로 되어 있을 뿐 실제로 그곳에 어떤 연고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그의 일생 대부분은 외가(外家)인 삼척의 두타산 밑 구동(龜洞 :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에서 보냈습니다. 대현 이율곡이 외가인 강릉의 역사인물인 것처럼 이승휴도 삼척의 역사인물로 숭앙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고종39년(1252) 이승휴는 29세의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가 계신 삼척으로 금의환향했으나 1253년 몽고의 제4차 침입으로 강도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자, 삼척의 요전산성에서 몽고군과 대항하여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 때부터 이승휴는 두타산 밑의 구동으로 들어가 지금의 천은사 옆 냇가인 용계(龍溪)변에 집을 짓고, 몸소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다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인 1263년 관동안집사(關東安集使)로 온 이심(李深)의 주선으로 강화에 들어가, 다음 해 경흥부(강릉) 서기로 발탈됨으로써 관계(官界)에 첫발을 딛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지방관 생활은 오래지 않았고, 곧 중앙의 도병마록사(都兵馬錄事)로 승진되어 중앙정계의 핵으로 급부상합니다. 그러나 충렬왕6년(1280) 감찰사의 관원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 항목으로 간언하다가 파직당하고 맙니다.

이승휴는 파직당한 후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당호(집이름)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국사와 세론에 일체 함구하고자 결심하고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왕운기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삼국유사]와 더불어 우리민족을 단군의 자손으로 규정한 사서(史書)로 유명한 제왕운기가 우리 삼척에서 삼척의 인물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대단한 자랑입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는 상하 2권 1책으로, 상권은 중국의 역사를 신화시대부터 원나라의 흥기까지 7언고시(七言古詩) 264구(句)로 읊어놓았으며, 하권은 우리나라의 역사(동국군왕개국연대)와 고려조의 역사(본조군왕세계연대)로 나누어 각각 264구 1460언의 7언고시, 152구 700언의 5언고시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왕운기는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저술하였는데 우리나라를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으며, 단군(檀君)을 우리민족의 시조로 내세워 우리민족이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강조했고, 최초로 우리나라 전체를 "조선(朝鮮)" 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또한 발해사를 현존 사서 가운데 최초로 우리민족사에 포용하였으며, 우리문화를 중국과 구분되는 독창적이고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했습니다. 사대를 표방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이처럼 중국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등한 구조 속에서 읊고 있는 것은 투철한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제왕운기를 저술하고 2년 후 1289년 용안당 남쪽에 보광정(?光亭)을 건립하고 그 곁에 표음정(飄飮亭)이란 샘을 만들고, 정자 아래 지락당(知樂塘)이란 연못을 시설하여 살다가 71세 되던 해(1294) 홀연히 용안당의 간판을 간장사(看藏寺)로 바꾸어 놓고 모든 재산을 불가에 희사합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이승휴를 특별히 기용하여 개혁정치의 중심세력으로 활약하게 합니다. 그러나 국정이 계속 표류되자 이승휴는 자신의 힘이 미력함을 인식하고 벼슬에서 물러납니다.

이승휴가 벼슬자리를 내놓고 정든 구동으로 돌아온지 2년 후인 1300년 10월, 77세의 나이로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치게 됩니다. 고려사 열전 이승휴조 끝 부분에 "성품이 정직하고 세상에 구함이 없었으며, 심히 부서법(불법)을 좋아했다" 라고 평하였습니다. 현재 그의 묘가 성주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승휴의 아들은 3형제인데, 첫째아들의 이름은 임종(林宗)으로 등과하여 헌부산랑의 벼슬에 있었으나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모셨고, 둘째 아들은 담욱(曇昱)으로 출가하여 불제 자의 길을 갔으며, 셋째 아들은 연종(衍宗)으로 등과하여 사헌규정을 거쳐 밀직사 겸 감찰대부에 이르렀다 합니다.


※참고자료 : [삼척시지][실직문화논총](삼척향토문화연구회,1989) , [천은사 이승휴유허지발굴조사보고서](관동대학교박물관,1999)


서류부가(壻留婦家)

처가살이. 고구려-고려-조선초기(16C말-17C초 폐지)

좌주문생(座主門生)제도

지공거와 과거합격자가 평생 사제관계 형성

춘추사관

공자에서 비롯됨. 왕의 일지형식 탈피, 작가의식 반영

1274년부터 80년간 50여 회에 걸쳐 몽고에 보낼 공녀 차출(1회 40-100명)

  • 궁녀용 : 중류 이상 가정의 미모의 규수
  • 병사용 " 과부, 고아, 역적의 처자, 승려의 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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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2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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