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제도의 변혁과 일제침략에 대항하여 척사위정의 민족적 사상과 국권수호의 구국적 행동강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하여 항쟁하였는데 삼척에서도 창의장 김헌경(倡義將 金憲卿)과 서기 김달호(書記 金達鎬) 등 유림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어 항일전을 전개했습니다. 삼척의 의병은 관동의병과 더불어 원산지역까지 올라가 일본군을 공격했고, 영동의병의 마지막 전투였던 삼척전투에도 참전하였습니다.

관동의병장 민용호(閔龍鎬)는 1895년 12월 3일 원주 신림에서 궐기하여 영월 평창 정선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12월 16일 강릉에 들어와 경무관 고준석(高俊錫)을 처형하니 관찰사 이위(李暐) 등이 인제의 산중으로 도망쳐 버렸고, 민용호는 강릉에다 관동창의도병소(都兵所)를 설치하여 관동지방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민용호와 강릉 창의장 심홍택(沈鴻澤)은 소모사(召募使) 3명, 전후영(前後營) 2명, 무사. 포군 100여 명을 거느리고 삼척에 와서 10여 일간 머물면서 삼척 창의장 김헌경, 서기 김달호, 선봉장 주명승(朱明昇)과 합세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우선 원산에 있는 일본의 세력을 공격하기로 하고 1896년 정월에 강릉을 출발하여 2월 6일 안변의 신평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전투준비를 하며 진격하던 중 천지를 분별할 수 없게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가운데 일본군의 습격을 받게 되어 2월 21일 의병들은 할 수 없이 강릉으로 후퇴했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원산공격에 실패하고 전열을 정비하고 있을 무렵 관찰사 서정규(徐廷圭)가 4월 12일 서울에서 내려온 김홍권(金鴻權) 중대장의 관군을 앞세워 반격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대관령 밑 대공산성에서 싸워 19명을 사로잡았으나 많은 관군이 계속 반격해 오므로 임계 백복령, 북평을 거쳐 삼척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의병들은 삼척에서 변덕스러운 울릉도 시찰사 염석하(廉錫夏)를 먼저 처단하고 앞으로 닥쳐올 대전을 위해 삼척읍성을 중심으로 진을 쳤습니다.
경군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삼척의병을 비롯한 관동창의군은 마지막 보루인 삼척성에 총집결하여 일제의 앞잡이 경군(京軍)과의 대혈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민용호대장은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어 몇 번이고 싸우지 말 것을 애원했으나 끝내 듣지 않아 결국 일대 혈전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삼척에 집결한 관동의병은 3개 지역으로 나누어 진을 쳤습니다. 읍 뒤의 갈야산 쪽으로는 민대장을 위시하여 최중봉(崔中峰), 강우서(姜禹瑞), 이영찬(李永燦), 전치운(全致雲), 신무섭 등이 호를 파고 매복해 있었고, 읍성에는 선봉장 김도현(金道鉉)과 민동식(閔東植)의 부대가 잠복했으며, 죽서루 동쪽에는 김헌경 김달호 주명승 등 삼척의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경군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시내로 들어왔고, 매복해 있던 의병들은 일제히 불을 당기니 이로써 삼척대전 일명 갈야산성의 일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896년 4월 19일 오전 6시에서 오후 6시까지 온종일의 혈전이었습니다.

갈야산과 그 북쪽 산봉 사이인 알개방재는 피차간의 사상자가 많아 피바다가 되었고, 읍성 안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의병들은 탄환이 떨어져 오십천으로 후퇴하였고 경군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성 안으로 들어와 불을 질렀습니다. 불꽃은 하늘을 찌를 듯 타올랐습니다. 민대장은 의병들을 거느리고 오십천을 따라 통리재를 넘어 정선으로 가고, 김도현은 그의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삼척 창의장과 서기는 붙잡혀 관군에게 문초를 받은 후 왕의 조칙에 의해 풀려나왔으나 관군은 북평으로 가서 창의장 김헌경의 집을 불태워버렸습니다. 삼척의 대전은 결국 의병군이 대파되었지만 200명의 관군도 50명만 살아 강릉으로 돌아갔으니 모두의 패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삼척혈전은 막을 내렸지만 외세를 몰아내고자 피 흘린 의병들의 의로운 정신은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 [삼척군지][삼척시지]


한말의 의병활동

고종43년(1906) 4월 의병장 이강년·황후경이 경내에 들어와 총포 및 양식을 거두어 갔다. 다음 해인 1907년 10월 30일 미로면 정동(鼎洞)에서 의병 500명이 왜병과 접전, 11월 18일 김생산(金生山)이 거느리는 의병대 600여 명이 황지에서 왜병과 접전, 김생산이 체포당하였다. 11월 26일에는 변학기(邊鶴基)가 거느리는 의병대 약 120여 명이 삼척군 반생야(般生野)에서 접전하였다(태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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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2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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