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 동해남부 고속도로를 타고 울진쪽으로 향하다가 보면 죽변 외곽도로인 간이비행장이 나오는데, 그 비행장이 끝나는 지점의 오른편에 봉평신라비와 비각이 있습니다. 이 봉평신라비에서 "실직국의 부흥운동" 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한 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봉평신라비는 1988년 3월 발견되어 4월 15일자 대구 매일신문 보도로 전국에 알려졌으며, 문화재관리국(청)과 대구대학교 연구팀의 조사 결과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진흥왕순수비보다 훨씬 이른 법흥왕 11년(524년)에 제작 건립된 봉평신라비는 1988년 11월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는데, 비석의 재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매우 불량한 편이며, 전체적으로 4각을 이루고 있으나 글씨가 새겨진 1면만 약간의 다듬질을 했고 다른 3면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2미터 높이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총 10행 399자이며, 서체는 예서에서 해서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글씨체로서 치졸한 편이고, 비문의 내용은 크게 4문단으로 나누어 집니다.

첫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신라인 13명이 갑진년 정월 15일에 종묘에서 조상신으로부터 게시를 받은 것으로 파악되고, 둘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13명의 일행이 거벌모라 남미지에 순행하여 벌교령(오늘날의 비상게엄령)을 내린 것으로, 셋째 문단은 신라 6부(部)가 상의하여 정한 바에 따라 집행관인 대인에 의해 지방관 및 토호에게 형을 집행한 내용이며, 넷째 문단은 총지휘 감독한 실지군주와 석각한 사람 등의 인적사항으로 파악됩니다.

이 비문에 의하면 505년부터 신라의 직접 지배를 받던 실직국 백성들은 524년 거벌모라성을 불태우는 등 대규모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사건은 신라측에서 보면 반란이지만 실직국으로서는 국권회복운동 또는 부흥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맙니다. 신라의 법흥왕이 친히 출병하여 난을 평정하고 지방관인 실지군주와 그 아래 실지도사와 거벌모라 도사에게 장형의 벌을 내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그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비석을 세워둡니다.

비문을 보면 거벌모라의 남미지라는 노인촌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있는데, 거벌모라는 당시 울진지역의 수부였던 봉평의 지명이고, 노인촌(奴人村)이란 신라에 정복당한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지칭하며 이들은 다른 지역주민들보다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으리라 보며, 거벌모라도사는 실지도사와 함께 삼척의 실지군주의 지휘 아래 있었으므로 이것은 곧 신라에 정복당했던 실직국 사람들의 부흥운동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 비문을 통해 "실직" 은 법흥왕 대에 "실지" 라는 지명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당시의 지방행정제도가 오늘날 도지사격에 해당하는 군주 아래, 시장 군수급의 도사가 지역을 통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지주의 경우 군주 아래 삼척의 실지도사와 울진의 거벌모라도사로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은 당시 거벌모라의 호족이었던 진(秦)씨 일족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일본 경도지방의 전역에 먼저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계 주민들을 장악하고 그 지방의 가장 힘있는 호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는 호오류사라는 절을 하타 가와가츠가 세웠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들의 힘을 짐작하게 합니다. 진(秦)은 일본어로 하타, 울진의 옛이름 파단(波但) 또한 일본어로 하타입니다. 한 지역의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살 때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예는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명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아직도 일본의 나라현 교토후 인근의 우즈마사촌(太秦村)에는 진씨(하타)의 종가가 살고 있으며, 진씨의 호수는 7,100여 호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1988년 7월 교토대 명예교수인 우에다 마사하끼박사가 일본학자로는 최초로 봉평신라비를 연구하기 위해 울진을 방문했고, 1989년에는 하타씨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일본 나가오카교오市 요오쿠사(寺)의 주지 구사카 다이코씨가 울진을 방문했으며, 1990년 봄에는 일본 영화감독 일행 5명이 봉평신라비와 마을 전경, 봉평해안과 북면 상당리의 진씨가(家)를 찾아 가대(家垈;집터)를 촬영해 갔습니다. 모두가 자기들의 뿌리를 찾기 위함입니다. 이들 모두 울진의 봉평신라비에 새겨진 "파단(波但)" 이라는 글자를 보고 하타(秦)씨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라고 확신했습니다.

일본의 사료에 진씨와 한씨, 하타우찌와 아야우찌 이 2대 씨족의 시조는 모두 응신왕 대인 4세기 후반에 귀화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실직국 부흥운동의 주도세력이었다고 추정되는 진씨 일족의 일본망명설은 향토사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고자료 : 울진문화 제4호(1989) 제6호(1991), [삼척시지]. KBS1TV 역사스페셜


신라는 통일 전 6정(停)이라는 6개 군단(軍團)을 각 지방에 설치하여 국토를 진수하였는데 실직주에도 실직정(悉直停)이라는 군단을 설치하였다가 무열왕(武烈王) 때 이를 파하고 북진(北進)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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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2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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