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를 폭력적으로 수탈하고, 일본 농민을 이주시켜 농업권을 장악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을 담당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악랄한 수탈과 농민착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간도지방 등 해외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농촌경제 수탈에 대하여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이어졌는데 강원특별자치도의 경우 삼척 임원리의 농민항쟁을 대표적인 사건으로 들 수 있습니다. 삼척의 향토지와 나이 드신 분들의 고증에 근거하여 임원리 임야측량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13년 4월에 임원리에서 국유림과 사유림에 대한 경계측량을 하는데 사유림을 부당하게 국유림으로 편입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국유지는 결국 일본정부의 소유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개인 소유의 임야를 국유지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항의할 목적으로 원덕면 주민 5백여 명이 운집하였습니다. 임원리 김치경(金致卿)의 지휘로 재측량을 요구하며 궐기하여 수일간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삼척군수 심의승(沈宜昇)과 원덕면장 김동호(金東鎬)가 일본인 측량기수 화장(花藏)을 대동하고 민중을 설득시키기 위해 임원리에 왔는데, 이 때 뒷산에서 몰래 사진촬영하는 자를 발견하고 군중들은 격분하여 측량기수를 죽이라고 외치며 몰려들어 타살하고 불에 태웠습니다. 그러자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군중들은 재빠르게 해산했지만 3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내는 참사였습니다.
일제는 향후 군중시위의 뿌리를 뽑기 위해 본보기로 주동자 김치경을 비롯하여 조정원(趙正元) 이락서(李洛書) 김문식(金文植) 김평서(金平書) 등 70여 명이 끌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역하고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원덕면의 유림들은 한 목소리로 간악한 일본 헌병들의 만행을 맹렬히 규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대는 대규모 민중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의 산양서원(山陽書院)을 방화하여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묘정비(廟庭碑)만 남게 되었습니다.

1971년 유림들의 정성으로 묘정비각은 중건하였으나 서원 본 건물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으니, 원덕주민들은 지금까지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98년 4.18 산양서원 묘정비는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참고자료 : [삼척군지][삼척시지]


1919년 기미년 삼척지역의 독립만세 시위운동

  • 삼척의 독립만세운동은 삼척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것이 대표적이다. 4월 14일 김달하(金達河)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심부윤(沈富潤) 오원모(吳元模) 등과 합의, 교사 김기홍(金基洪)의 지원을 받아 다음날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독립선언서 낭독 후 독립만세를 불러 삼척읍을 진동시켰다.
    이 때 교장 산전(山田)은 천황의 칙어(勅語)를 옷 속에 감추어 뒷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당시 강원특별자치도 장관의 보고에 176명의 생도가 참가했고, 강원특별자치도 헌병대장의 보고에 94명을 훈계 처분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컸고, 전교생이 호응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 삼척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에 일반주민들도 자극을 받아 삼척김씨 시조 실직군왕묘의 춘계 전사일을 기해 300명이 시위를 벌이려고 했으나 사전에 기미를 알고 출동한 헌병대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 삼척보통학교의 운동은 북삼면 송정보통학교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당시 학생이었던 김정경(金鼎卿, 전삼척교육장)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4월 17일 주하영(朱夏英) 김진수(金振壽) 홍학현(洪學鉉) 등이 주동하여 오후2시 50여 명의 학생들이 만세를 불렀다고 하며, 이 때문에 직원실에서 헌병의 모진 취조를 받았다고 한다. 또 송정의 김형국(金炯國)·효가리의 홍순황(洪淳璜)선생이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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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2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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