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형(鄭斗亨)
조선 중종때의 문신ㅗ효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천장(天章), 호는 낙전당(樂全堂), 몽주(夢周)의 7세손, 도사(都事) 치온(致溫)의 손자, 충원(忠元)의 아들. 강릉 말산리(末山里)에서 태어났는데 가슴 위에 북두칠성과 같은 흑점이 7개가 있었다. 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삼척 초분리(草紛里)에 와서 살았다. 1540년(중종 35) 생원급제,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박사(博士)ㅗ전적(典籍)ㅗ주부(主簿)를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 충청도사(忠淸都事), 호조정랑(戶曹正郞),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있던 1553년(명종 8)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생활을 마친뒤 감찰(監察), 형조정랑(刑曹正郞), 영월군수(寧越君守)를 지냈고, 1560년(명종 15) 다시 형조정랑이 되었다가 은계찰방(銀溪察訪)으로 있을 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갈려고 하였으나 고향 근처인 고성군수(高城郡守)로 제수(除授)되었다. 1567년(명종 22)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있다가 1570년(선조 3) 늙으신 어버이 봉양에 편리하기 위하여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임명되었다. 1571년(선조 4)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세상을 떠나니 나이 65세요, 나라에서는 독실한 효행을 기려 부자와 함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