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 자는 장익(章益), 호는 휘남(輝南), 연중(演重)의 조카. 성품이 강직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간의 우의가 돈독하였다. 그리고 경사(經史)에 능통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 영동지구에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삼척지구의 창의장(倡義將)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07년(융희 1) 삼척군 주정(主政)으로 임명되고, 다음해에 군수서리(郡守署理)가 되었다. 또 이때 삼척향교의 신유림파(新儒林派)와 구유림파(舊儒林派)간의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서로간의 알력을 조정 무마시켰다. 그후 터무니없는 일로 고소를 당하여 1910년 서울의 감옥에서 사망하자 향리에서 시체를 운구하여 돌아와 사림(士林)들이 예장(禮葬)하였다. 유고(遺稿)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