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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나라 실직국

작성일
2022-01-01 10:24:48
작성자
김○○
조회수 :
382
 해 나라 실직국
                                                                         김 강산

1. 서 론

실직국(悉直國)은 단기2433년(서기100년)대 지금 강원도 삼척시 일원으로 삼척시 뿐만 아니라 동해시 태백시 멀리 경상북도 울진군도 포함되는 동해 바닷가에 자리한 나라였다.
나라의 위치가 중요하고 차지한 영토가 커 삼척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주는 것이었음에도 실직(悉直)이 실직(失職)과 발음이 같고 사직(史直)이 사직(辭職)과 발음이 같다 하여 부르기 꺼려하며, 지나간 역사가 우리에게 뭘 주느냐며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고, 또 삼척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으며 삼척의 위대함을 일깨울 목적으로 이 글을 쓴다. 

2. 본 론

1) 역사에 나타나는 실직국 

실직국(悉直國)은 실직곡국(悉直谷國)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강성할 때는 북쪽으로 명주(강릉)의 예국(濊國)과 겨루고 남쪽으로는 경주 북부지역인 안강 쯤에 기반을 두고 흥해나 영덕부근까지 진출한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 확장 정책에 복속되고 말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일(卷第一) 신라본기(新羅本紀) 제일(第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 조에 보면,
“...(전략)...실직과 압독 2국왕이 항복하여 오다...”(...悉直押督二國王來降...)(1)
라고 하여, 실직국이 항복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직국은 항복하는 척하며 안으로 재기할 뜻을 품고 힘을 키웠다. 
경상북도 울진군에 가면 안일왕성(安逸王城)이 있고 왕피리(王避里)가 있다. 그때 실직국이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悉直國(실직국)의 마지막 왕인 安逸王(안일왕)이 결사항전한 곳이 안일왕성이고 마지막으로 王(왕)이 避(피)해간 곳이 王避里(왕피리)인 것이다. 왕피리 끝 首匕(수비)까지 쫓기면서 부하의 배신으로 머리가 날아갈 정도로 싸웠으나 결국 실직국이 지고 그로인해 망했다.
2년 뒤 같은 책 같은 곳의 기록에,
“25년 가을 7월에 실직이 배반하기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남은 무리는 남쪽 변경으로 옮겼다.”(二十五年秋七月悉直叛發兵討平之徙其餘衆於南鄙)(2)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실직국의 실세나 관리는 어딘지 모르나 신라의 남쪽에 있는 변경으로 끌려가고, 일반 백성은 그냥 남았다고 본다. 
이 뒤 실직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2) 해 나라

실직국(悉直國)은 신라에 복속되었고, 나중에 실직주(悉直州)로 고쳤으며 그 뒤 직주(直州) 또는 척주(陟州)로 바뀌었다.
아시아강원민속학 제30집 속의 <古代 이름에 대한 考察>에 보면.
“...(전략)...삼척 사람들은 한자로 悉直(실직)이라 써 놓고는 읽기를 ‘새치’라고 했다. 새치의 ‘새’는 ‘해’의 고어(古語)이고 ‘치’는 나라나 땅, 장소를 나타내는 말이므로 ‘새치’는 해의 땅, 그러니까 ‘해의 나라’였다. 그래서 ‘새치’를 한자(漢字)로 표기한 것이 실직(悉直)이다. 실직국(悉直國)이 망하자 신라(新羅)에서는 悉直州(실직주) 또는 直州(직주)라고 했고, 비슷한 소리가 나는 陟州(척주)로도 표기하였으며 나중에는 ‘새치’와 비슷하게 발음되는 三陟(삼척)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삼척의 고호(古號)에 진주(眞珠)가 있는데, 참 얼토당토 않는 지명(地名) 같지만, 이것은 과거에 직주(直州)라고 했을 때, 直과 眞이 비슷하고 통용되는 글자이기에 소리 나는 데로 쓴 것이 진주(眞珠)일 뿐이다.   
예컨대, 契丹(계단)이라고 한자(漢字)로 써놓고 ‘거란’이라 읽는다든가 牧丹(목단)이라고 써 놓고 ‘모란’이라 한다던가, 만주의 여진족(女眞族)의 女眞(여진)을 女直(여직)이라고도 썼으니, 한자는 소리말인 우리말을 표기하는 수단에 불과하고, 진(眞)과 직(直)은 통용되던 한자였다. 그래서 직주(直州)와 같은 뜻인 진주(眞州)를 소리 나는 데로 진주(眞珠)로 표기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실직(悉直)이나 척주(陟州)는 ‘새치’의 이두적기에 지나지 않고, 직주(直州)의 직(直)과 진주(眞州,眞珠)의 진(眞)은 서로 통하는 글자로 같은 뜻인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삼척(三陟)이라 하였고, 석三에다 초점을 맞추다보니 일부에서는 셋(三)과 연관된 것을 찾고자 하는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한다. 지금은 석三으로 새김 되는 글자이지만 옛날엔 세三이요, 셋三이다. 넷(四)이 넉(四)으로 변하듯 석三의 고어(古語)는 세(새)삼이며, ‘새’는 ‘해’를 뜻하는 것이었다.
‘새치’는 무엇인가. 해가 비치는 밝은 곳이란 뜻이다. 해 뜨는 동쪽(새쪽)에 위치한 나라이기에 ‘새치’이고 ‘해의 나라’라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直(직)’ ‘眞(진)’ ‘陟(척)’ 등은 같은 표기이고 같은 말을 한자로 다르게 표기한 것일 뿐이므로 한자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리가 중요하고 소리의 변천과정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후략)...”(3)
라고 하였다.
동해 바닷가에는 실직국(悉直國) 말고도 명주(강릉)의 예국(濊國) 춘천의 맥국(貊國) 경주의 신라(新羅) 등의 나라가 있었다.
이들 나라들이 모두 해(日)를 국가의 상징으로 삼고 있으며 실직국(悉直國)도 해 나라임을 자부하였던 것이다. 
실직국(悉直國)이 실직주(悉直州) 직주(直州) 척주(陟州) 사직(史直) 삼척(三陟) 등으로 변하다보니, 최근에 어떤 자가 三(삼)에 초점을 맞춰 三(삼)과 연관된 것을 찾는 것을 보았다. 예컨대 삼척에서 떨어져 나간 동해시(東海市) 태백시(太白市)를 포함 삼척시(三陟市)를 합쳐 보니 三(삼)이요, 삼화사(三和寺) 등 등 三(삼)과 연관된 것을 찾으며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해의 나라 또는 해의 땅을 이두표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직 땅 곧 삼척 땅은 해의 땅,  해 뜨는 밝은 땅이다.

3) 우산국의 정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6년 조에 보면,
“6년 봄 2월에 왕이 친히 주.군.현을 정하고 실직주를 두어 이사부로써 군주를 삼았는데, 군주의 이름은 이에서 비롯되었다...(후략)...”(六年春二月王親定國內州郡縣置悉直州以異斯夫爲軍主軍主之名始於此...)(5)
라고 하면서, 이사부를 실직주의 군주(軍主)로 하였음을 알겠다. 이어서,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이 귀순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품을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 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혹은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지방은 100리이며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자, 우산 사람들은 어리석지만 사나워 위세로는 굴복시키기가 어려우니 꾀로써 항복시켜야 한다며,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싸움배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바닷가에 이르러 거짓으로,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들을 놓아서 너희들을 밟아 죽이겠다.’고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곧 항복하였다.(十三年夏六月于山國歸服歲以土宜爲貢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或名鬱陵島地方一百里恃嶮不服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于山人愚悍難以威來可以計服乃多造木偶師子分載戰船抵其國海岸誑告曰汝若不服則放此猛獸踏殺之國人恐懼則降)(6)
라고 기록되어 있다. 혹시나 하여 열전 이사부 편을 보니,
“...(전략)...13년 임진에 이르러 아슬라주 군주가 되었다. 우산국을 병탄할 모의를 하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지만 사나워 위세로는 항복시키기 어려우므로 계락을 써서 굴복시키는 것이 옳다 여겨,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싸움배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의 바닷가에 가서 속여 말하길, ‘너희가 만약 복종하지 않으면, 사나운 맹수를 풀어놓아 밟아 죽이겠다.’ 고 하니,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곧 항복하였다...(후략)...”(...至十三年壬辰爲阿瑟羅州軍主謨幷于山國謂其國人愚悍難以威降可以計服乃多造木偶師子分載戰舡抵其國海岸詐告曰汝若不服則放此猛獸踏殺之其人恐懼則降...)(7)
라고 하여,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위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사부가 하슬라주(명주) 군주(軍主) 때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였는데, 삼척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사부가 실직주(삼척) 군주 때 우산국을 정벌한 것으로 이야기하니 어이가 없다.
이사부가 실직주(삼척) 군주를 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는 실직주 군주를 거쳐 하슬라주(강릉 ) 군주로 가서 우산국을 정복한 것이다.
소위 글 좀 아는 자들이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을 어찌하여 가만히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일제(日帝) 때에 아직 농경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명주(강릉)에 비해, 삼척은 일제(日帝)의 삼척개발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항만. 철도. 광공업 등이 발달하자 나름 깨인 동네가 된 것이 요인이 아닌가 하며, 한 때 먼저 말뚝을 박으면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이 같이 당치도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삼척시의 상징 동물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사자라나 뭐래나, 어찌하여 사자냐고 물으니 우산국을 정벌한 이사부의 목우사자(木偶師子)를 말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삼척시가 실직국과 이사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던 말든, 지금도 순정공의 아내 곧 수로부인에 대한 상을 세우는 등 단물은 빨아먹으면서도 잘못된 것을 방치하고 시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역사에 큰 죄를 짓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 터인데, 가만히 있는 명주(강릉)는 뭔가? 꺼리가 많으니 그냥 있겠다.? 2시(市)가 모두 직무유기든가 무식한 무리들이 근무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된다.
 
4) 실직국 왕릉을 특정 성씨가 차지하다.

허목(許穆)이 지은 척주지(陟州誌)에 보면, 
“사직은 옛날 실직씨의 나라로 신라 파사왕 23년에 항복하였다. 신라 지증왕 6년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김이사부를 군주로 하였다. 실직국 또는 실직곡국이라 하는데, 지금 사직 남쪽에 위아래로 2기의 무덤이 있다. 그 위의 무덤은 무너졌는데, 그 안에 돌을 깎아 석장(石葬)하였고 수십 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며 높이가 한 길이 넘는다.”(史直古悉直氏之國新羅婆娑王二十三年降新羅智證王六年初置悉直州以金異斯夫爲軍主悉直國或曰悉直谷國今史直南有上下二塚其上塚崩毁其中削石爲石葬容數十人高仞餘)(4)
라고 하며, 실직국의 옛 무덤을 말하고 있다.
무덤에 돌을 깎아 석장(石葬)할 정도로 강력한 나라였기에 그 무덤이 남아있고 역사기록과 전해지는 말과 증거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방치되어 있던 것을 단기4133년(서기1800년)대 삼척의 토성(土姓)인 삼척 김씨네가 자기들 조상의 묘라 하여 수축하고 지금 김위옹(金胃翁)의 묘라 하고 있고, 또 1기의 무덤은 그 부인묘라 하고 있다.
얼마 앞, 북평의 산업단지의 조성을 위해 일대의 무덤들을 옮기게 되었고, 삼척 박씨네가 시조묘(始祖墓)라 하며 가꾸고 돌본 무덤이 있었는데, 이장(移葬) 때문에 파 보니 시조묘가 아니라 삼국시대 무덤으로 밝혀져, 그동안 엉뚱한 남의 묘를 시조묘로 알고 제사하고 가꾼 것이 밝혀진바 있다.
조상묘나 시조묘가 없거나 모르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세월이 흐르고, 우리나라처럼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실묘(失墓)할 수도 있지, 남의 묘를 자기 것으로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지금 자기 조상묘를 시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성씨나 집안이 얼마나 될까?
나도 삼척 김가이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보며, 없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뻔히 알면서도, 삼척 박씨네처럼 남의 묘를 자기 조상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삼척 김씨네가 자기들 조상묘라고 하는 것은, 옛 실직국(悉直國)의 왕릉(王陵)이기에, 삼척시에서 고증을 통해 밝혀내야 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본다. 
삼척시가 실직국의 옛 터전에 살면서도 실직국을 부정하고 그 부수적인 것을 확실히 하지 않고 얼버무린다면 후대에 크게 우스갯거리가 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실직국 왕들이 문헌에서 말하는 실직씨인지 아니면 박씨인지 이씨인지 김씨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특정 성씨가 그 왕릉을 자기네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역사의 왜곡일 뿐만 아니라, 옛날에는 먹힐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다.

5) 쉰내를 한자로 五十川(오십천)이라 하다.

쉰내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산골 흰늪에서 발원하여 미인폭포를 만들고 북류하여 도계읍을 지나 죽서루 아래를 거처 동해로 흘러가는 총 길이 약59km의 하천이다.
쉰내는 실직국(悉直國)의 본거지인 삼척의 한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으로 바다에서 내륙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물길을 가진 동해안에서 몇 안 되는 입지를 갖춘 곳이다.
나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오십천을 쉰내로 부르는 것을 듣고 자랐다. 그런데 그 쉰내를
한자로 五十川(오십천)이라 한다.
우리 이름 쉰내가 있음에도 한자로 된 五十川(오십천)이 통용되고 있다.
五十川(오십천)이란 말이 생기자 거기에 합당한 말을 만들어야 하기에, 오십번 물을 건너야 한다는 둥 말을 만든 것으로 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삼척도호부 산천(山川) 조의 五十川(오십천)에 보면,
“...(전략)...그 근원으로부터 도호부까지 무릇 47번 건너므로 대략 오십이라 오십천이라 한다...(후략)...(...自府至其源凡四十七渡故摠成數稱五十川...)(8)
라고 하며, 말도 아니 되는 주장을 하는데, 이 뒤 거의 모든 문헌이 따라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허목(許穆)의 척주지(陟州誌)에도 나오니,
“...(전략)...큰 내가 있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근원은 우보산에서 나와 오십 번 굽이치므로 이름을 오십천이라 한다...(후략)...”(...有大川東流入海源出牛甫山屈曲五十故名曰五十川...)(9)
라고 되어 있다. 
그밖에도 각종 문헌에 47번 건넌다든가, 굽이가 오십 번이라는 둥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다못해 삼척군(三陟郡)에서 만든 삼척군지(三陟郡誌)에도,
“...(전략)...동해로 들어간다. 장장 50km로 이 고장에서 가장 긴 하천이다. 옛날 삼척에서 영남으로 오고 가는 길은 이 오십천의 연안을 통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이 오십천을 따라 가자며는 47번이나 물을 건너야 하므로 어림잡아 50번 건너간다 하여 오십천(五十川)이라 이름하였고, 또 오십 굽이나 휘돌아 내리는 물이라 하여 오십천이라 하였다...”(10)
라고 되어있다.
산악이 많은 우리나라의 하천은 굽이가 심하고 다리가 없던 옛날엔 하천을 건널 수밖에 없다. 47번 건너야 하므로 어림잡아 오십번, 그래서 오십천이라 한다고 하니 설득력이 없다.

6) 해 내

그러면, 쉰내의 뜻은 무엇일까?
아시아강원민속학 제30집 속의 <古代 이름에 대한 考察>에 보면,
“오십천(五十川)은 구비가 많아 약50번 정도 물을 건너야 하기에 붙은 이름이라 하는데,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에 있는 오십천(五十川) 또한 비슷한 유래를 가지고 있다.
경상북도 영덕군에 있는 오십천(五十川) 또한 강구항(江口港)에서 동해(東海)로 흘러드는 하천(河川)으로 바다에서 내륙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물길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하천이다.
영덕의 오십천은 ‘쉰내물’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삼척의 오십천도 옛날엔 ‘쉰내’라 불렀다. 물론 50을 ‘쉰’이라 한다. 하천의 구비가 심해 47번 정도를 건너야 하기에 어림잡아 50번 건넌 것으로 여겨 오십천(五十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악이 많은 지형이라 하천의 구비가 심하다. 어느 하천이든 다리가 없던 시절 몇 십번은 건너야 하는데, 오십(五十)이란 숫자에 매몰되어 거기에 합당한 구실을 찾다보니 오십도(五十渡), 곧 오십번 건너야 하는 이유를 댔을 뿐이다.
오십천의 본디 이름인 쉰내의 ‘쉰’은 ‘샛’이 변한 말로 東(동)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 ‘새’ 곧 ‘해(日)’를 뜻하는 말이다.
해 뜨는 동쪽 바다로 흐르는 하천이기에 ‘해(日) 내’ 곧 ‘새 내’라 하다가 그 말이 변해 ‘샛 내’ ‘싯 내’ ‘쉰 내’가 된 것이고, 그것을 한자(漢字)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한자에 ‘쉰’자가 없고, 마침 五十(오십)을 ‘쉰’이라 하니 한자로 오십천(五十川, 쉰내)이라 표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11)
라고 하였다.  
지금도 바닷가에서는 동쪽을 ‘새쪽’이라 하고, 동풍(東風)을 ‘샛바람’이라 한다.
‘쉰 내’는 음식이 쉬었다는 뜻의 ‘쉰 내’가 아니라 해 뜨는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란 뜻의 ‘새 내’에서 변한 말이 ‘쉰 내’이고, 다만 한자(漢字)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한자에 ‘쉰’자가 없기에 비슷한 뜻을 가진 五十(오십, 쉰)으로 표기 하여 五十川(오십천)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삼척시에 있는 쉰 내 곧 五十川(오십천)은 47~50번 건너야 하므로 五十川(오십천)이 아니라, ‘해 내’이며 해 뜨는 곳의 냇물이다.

3. 결 론

우리는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삼척은 동해(東海) 바닷가에 닿아있는 도시로 해 뜨는 곳의 전통을 이은 땅이다. 실직국의 옛터에 자리 잡은 삼척(三陟)은 해의 고장으로 왕조(王朝)의 흥망을 지켜봤으며, 고유한 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우리나라 산업번영의 공로자이다.
그러나 역사서를 잘못 해석하거나 아전인수격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알면서도 껄끄러우니 그냥 있다면, 이 고장의 미래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남기겠는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잡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고 말할 용기마저 없고 남의 눈치나 살피려한다면, 어찌 식자(識者)라 하고, 후진들에게 부끄러움만 남길 것이다. 
삼척(三陟)은 햇빛 아래 찬란한 문화와 역사가 있는 곳이고, 또 해 뜨는 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註(주)
(1) 金富軾 三國史記 양현각 1983
(2) 金富軾 三國史記 양현각 1983
(3) 아시아강원민속학 제30집 아시아강원민속학회 2018
(4) 許穆 陟州誌 三陟鄕土文化硏究會 1991
(5) 金富軾 三國史記 양현각 1983
(6) 金富軾 三國史記 양현각 1983
(7) 金富軾 三國史記 양현각 1983
(8) 盧思愼 東國輿地勝覽 明文堂 1981 
(9) 許穆 陟州誌 三陟鄕土文化硏究會 1991
(10) 三陟郡誌 三陟郡 1988
(11) 아시아강원민속학 제30집 아시아강원민속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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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4-05-17 23: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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